노인상담의 발전

의학의 선구자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노인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는 의학의 선구자인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로부터 기원된다. 그는 피타고라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질병이란 혈액, 담, 황담즙, 흑담좁이라는 4체 액설의 균형이 깨지는 결과,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노화도 역시 비숫한 원인으로 생겨난다고 이해하였다. 히포크라테스는 최초로 인간의 인생단계를 자연의 사계절에 비교하여 설명하였으며 노년을 겨울에 비교하였다. 그에 의하면 노화는 약 56세에 시작되며 건강을 위해 노인들이 모든 영역에서 절제가 필요하며 또한 계속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충고하였다(Simone de Beauvoir, 2003).

노화는 열이 식는것 같은 것

이러한 히포 크라테스의 노인 이해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인에 대한 이해가 지배적인 사고 패러다임이 되었다. 그에 의하면 생명의 조건은 내적인 열이며 여기서 노화는 열이 식는 것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노년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관점이 되었다. 그 후 노인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발전하던 해부학을 통해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해부학의 거장인 독일의 베잘리우스는 신체해부를 통해 인간이 화학적 구성이며 노화란 자가 중독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17세기부터 노년에 대한 다양한 저작들이 나왔으며 노인병리학이라는 분야가 19세기에 발생하였다.

현대적 의미의 노인상담은 미국에서 시작

노인병리학의 선구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인 네이셔이다. 그는 최초로 노인의 질병을 단순히 노화로 인한 것으로 보지 않고 노인의 질병이라는 차원에서 인식하였고 이것을 노인정신병리학이라고 불렀다 1912년에 그는 뉴욕에 노인병리학회를 창설하였다. 현대적 의미의 노인상담은 역시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1950년에 서 1960년 사이에 양로원에 입소되어 있는 1차대전 참전병과 대형 병원에 입원해 있는 노인환자들의 심리적인 필요, 고독 그리고 특히 우울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집단치료가 사용되었다. 다양한 직업 집단의 참가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러한 치료경험은 1960년과 1970년 사이에 강력한 지원과 함께 정신분석 훈련을 받던 정신과 전문의에 의해 보다 체계화되였으며 또한 이론적으로 더욱 발전되었다. 이를 위해 “Boston Society for Gerontologic Psychiatry”가 1963년 세워졌다. 관련 심포지엄의 수행을 위해 “Journal of Geriatric Psychiattry”가 1969년에 세워졌다. 외래 개인심리치료적인 방법의 집중적인 사용이 이것의 한 결과물이었다.

1970년부터 미국에서 노인심리학적 연구결과와 중요 학습 이론의 개념에 근거한 개입노년학’ (Interventionsgerontology)이 많은 다양한 사회적 치료방식, 훈런과 재활방법을 가능하게 했으며 계속해서 행동치료의 중요한 치료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노인상담의 치료경험이 다양한 사람들, 즉 의사가 아닌 직업집단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반대로 전통적인 심리치료사들은 거의 노인상담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예를 들어 Freud (1940~1952)는 50세가 넘은 사람들에게 정신분석을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노인상담에 관심을 가진 대부분은 심리상담에 대해 문외한이었으며 전문적인 상담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노인상담이 노인 내담자들에 대해 충분한 치료적 효과가 발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최초의 이러한 노인상담은 계속 진행되지 못하였고 또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초기 노인상탐의 진행자들은 노인상담의 실패를 상담자 자신의 불충분한 상담적인 경험과 자격요건에 돌리기보다 노인의 완고함으로 떠넘졌다. 비전문가들에 의해 수행된 초기 노인상담의 상담적 대화(Dialog)는 오랜 시간 노년과정과 치료필요조건에 대한 적절한 규정 역시 만들지 못해 초기의 노인상담의 내담자들은 대부분 대형정신병원이나 노인병원, 양로원 등에서 오랫동안 치료받던 장기 정신질환자이거나 신체적 합병증마저 갖고 있던 노인 정신질환자들이었다. 초기 노인상담의 기본적인 치료방식으로 집단상담이 주로 활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내담자들은 서로를 지원하고 힘든 경험을 서로 나누고 접촉을 촉진할 수 있었다.
초기 노인상담의 치료목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중요시되였다. 독립, 희복된 자율성의 회득, 사회적 능력의 유지, 신체적ㆍ심리적 사회적 능력의 훈련 및 재활, 질병의 사용과 극복, 문제 해결, 제한된 수명 위에서 죽음의 극복과 인생회상 등이 있다. 반대로 심리상담에서 대표적인 목표인 클라이언트의 성격의 변화는 점차로 그 중요성이 감소되며, 반면에 증상 최소화, 갈등 해결 그리고 심리적 장애의 공간 속에서 성격구조의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정신의학, 심리학, 정신분석, 행동치료, 정신신체의학에서는 노인의 문제, 60세가 넘는 내담자의 치료에 대해 이 당시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학과 학문적 연구단체들과의 제도적인 연구가 확립되면서 본격적으로 노인상담의 분야가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에서의 노인상담 발전

유럽에서의 노인상담의 발달은 미국보다 최소 10년 정도 지체되었다. 스위스에서 C G Jung에 위한 의해 시작된 심리치료적 분석적 가능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중년기 내담자를 위한 심리치료적 가능성을 전개하였 으며 아울러 여기에 노인 내담자를 위한 치료적 접근도 이루어졌다. 두 번째로 유럽 노인상담의 발전은 Rausanne 대학의 정신의학 병원에서 노인정신의학과가 설립되면서 결정적으로 시작되었다. 스위스의 의사들이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심리치료 보수교육을 받은 것은 노인상담의 발전에 역시 유리한 환경으로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계기를 통해 노인 내담자에게 전문의사들의 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Miller, 1967).

독일에서의 노인상담 발전

독일에서 노인상담의 발전은 역사적 상황과 연결이 된다. 독일에서 정신분석은 오랫동안 나치정권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정신분석적 상담과 심리치료의 선구자들 중에 상당수가 유대인이라는 것이 박해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이러한 박해로 인해 형성된 정신분석적 상담과 심리치료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의 영향은 2차대전 이후 정신분석과 여기서 파생된 심리치료들을 다양한 내담자를 위한 통합적 치료로서 인식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신병리와 정신 전문의름 위한 보수교육에 적절한 심리치료 관련 교육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러한 왜곡헌상을 잘 반영해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1970년부터 시작된 노인정신병리학자들의 모임은 심리치료적인 배경을 전혀 갖지 못하였다.

전쟁 이후에 정신분석가들이 점차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나 이들 전문가들의 숫자는 아주 천천히 증가하였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이 오랜 수련기간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성장으로 독일에 정신분석센터가 설립되게 되었으며, 정신분석가들은 우선적으로 25~45세의 성인 클라이언트를 위한 치료를 제공하였다. 그후 55~65세의 성공한 정신분석가들이 주도하여 베를린 자유대학(FU Berlin)의 정신의학 병원에 심리치료과를 세웠고, 재활병동에서 1967년과 1969년 사이에 60세가 넘은 클라이언트들을 위한 개인, 집단상담을 실시하였다(Radebold &x Richter 1970). 1970년부터 울름(Ulm)대학의 심리치료학과에서 개인과 집단 심리치료의 형태 속에서 특히 50~70세의 클라이언트를 대상으로 연구를 하였다. 노인상담의 발전은 드디어 노인관련 분야에서 상담관련 활동을 하는 사회복지사들에게 심리상담적 방법을 받아들이게 하였다(Radebold, 1973).

한국에서 노인상담의 분야는 아직 시작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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